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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
그러니까, 그런 일이 있었다.
졸업을 한 지 얼마 안 되어 집에 있을 때였다. 죠노우치는 자신의 앞길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유우기는 새로운 게임을 개발하고 싶다고 말했고, 혼다는 아버지의 일을 물려받고 싶다고 말했다. 안즈는 춤을 배우기 위해 미국으로 떠났다. 죠노우치 혼자만 멍하니 동떨어져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하던 죠노우치는 집 안에서 한숨이나 내쉬고 있었다. 리모컨을 들고 TV나 돌리고 있는데, 어느 순간 뉴스가 나왔다. 느리게 흘러가던 시간이 순간 멈춘 것 같았다. 죠노우치는 저도 모르게 멈칫하고는 브라운관에 시선을 고정했다.
TV를 채운 것은 카이바 세토였다.
카이바는 사업을 확장하고 전국적으로 새로운 듀얼 대회를 연다고 했다. 그 뉴스는 그것에 대한 공지였다. 반짝반짝 빛나는 카메라 플래시가 카이바의 온 몸을 뒤덮고 있었다. 기자들의 질문에 능숙하게 대처하며 언제나와 다름없는 냉철한 얼굴로 카메라를 쏘아보는 카이바의 눈과 죠노우치의 눈이 문득 마주쳤다. 순간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카이바는 죠노우치를 보고 있지 않았다. 죠노우치만이 카이바를 보고 있을 뿐이었다. 죠노우치는 브라운관 위로 손을 올렸다. 만져지는 것은 인간의 피부가 아닌 기계의 겉표면이었다. 문득, 목끝까지 무언가가 울컥 치밀었다.
카이바 세토와 함께 했던 날도, 분명 내게 있었을 텐데.
죠노우치는 실소했다. 이제는 영원히 닿을 수 없을 것만 같은 날들이었다. 이미 간극은 벌어졌다. 영원히, 그 괴리감은 좁혀지지 않을 것이었다. 뭘 어떻게 하겠는가. 그는 카이바 세토고 자신은 죠노우치 카츠야였다. 한낱 범골 듀얼리스트 따위에 불과한. 하지만, …그렇지만…….
죠노우치는 듀얼디스크를 들고 밖으로 나섰다. 목표는 이미 예전에 정해져 있었다.
*
죠노우치는 숨을 몰아쉬었다.
뜨여진 눈 사이로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눈을 느리게 깜박였다. 방 안은 푸른 어둠이 가득했다. 언제 밤이 된 걸까.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죠노우치는 그 자리에서 숨을 헐떡였다. 문득, 차가운 무언가가 그의 이마에 와 닿아 머리카락을 쓸어넘겼다. 죠노우치는 눈을 굴려 이마에 올려진 것을 바라보았다. 누군가의 손바닥이었다.
“……….”
죠노우치는 느리게 그 손을 타고 시선을 올렸다. 길고 얇은 손가락을 지나 마주친 푸른 눈은 그를 곧게 바라보고 있었다.
“…야, 카이바.”
“………뭐냐.”
카이바가 대답했다. 어라, 때리질 않네. 죠노우치는 혼몽한 가운데 생각했다. 차가운 눈동자와는 다르게 죠노우치의 이마에 닿은 손은 부드러웠다. 금방이라도 깨져 없어질 무언가를 다루듯 조심스러운 손길이었다. 카이바 세토가 이런 것도 할 줄 아는 남자였던가. 죠노우치는 킬킬거렸다. 죠노우치의 웃음에 카이바의 미간이 살짝 좁혀졌다. 죠노우치는 몰아쉬는 숨 사이로 말했다.
“넌 말야.”
“……….”
“진짜 병신 새끼야.”
“하?”
죠노우치가 다시 웃었다. 카이바는 어이가 없다는 듯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의문이 가득 담긴 눈동자가 너무나도 우스워서, 죠노우치는 허리를 굽혀 낄낄거렸다.
“그리고, 좀 미친 새끼기도 하지.”
“…자라.”
“있잖아.”
죠노우치는 웃음을 그치고 그를 바라보았다. 올곧게 부딪쳐오는 눈동자에 카이바가 잠깐 몸을 움찔했다. 죠노우치가 속삭이듯 내뱉었다.
“난 안 알려 줄 거야.”
“…뭘 말이지?”
“네가 원하는 것.”
카이바는 침묵했다. 어떻게 대답할지를 몰라 망설이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죠노우치는 입술을 말아올려 다시 한 번 웃었다. 목에 걸린 목줄은 아직까지도 숨통을 조여오고 있었다.
“넌 멍청한 놈이라 아마 평생 가도 모를 걸.”
“……….”
“알려 주면 편할 지도 모르지. 근데, 싫어.”
죠노우치는 미소지었다.
카이바가 왜 죠노우치를 사랑하는지, 그 이유는 알고 싶지 않았다. 오히려 모르는 것이 나았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죠노우치는 카이바의 일그러진 얼굴이 꽤 마음에 들었다는 것이었다. 하물며 그것이 죠노우치로 인한 것임에야.
카이바는 역겨운 자식이다. 그러나 빌어먹게 잘난 자식이기도 했다. 죠노우치는 카이바를 동경하고 애정함과 동시에 끔찍하게 혐오했다. 눈앞에서 어딘가로 사라지는 카이바의 모습을 수년째 바라보았다. 닿을 수 없는 거리와 멀어진 간극. 애초에 맞닿은 날이 존재하기나 했던가?
죠노우치 카츠야란 인간은 카이바 세토에게 있어 어떠한 존재였을까. 문득 그런 것을 생각했던 때가 있었다. 나오는 답은 너무나도 간단해서, 죠노우치는 제 생각을 비웃어 버리고 말았다. 카이바 세토에게 있어 죠노우치 카츠야라는 존재는 땅을 기는 개미 수십, 수백 마리 중 한 마리에 불과했을 것이다. 그를 잊을 수 없어 그림자를 쫓고 있는 것은 죠노우치 뿐이었다. 죠노우치는 자신이 그 그림자에서 영원히 벗어날 수 없으리라 생각했다. 그만큼, 짙은 그림자였다. 그러나 영원히 따라잡을 수 없던 동경은 제 스스로 추락해 땅을 기는 짐승이 되었다. 자신을 완전히 잃어버린 채 그가 그토록이나 하찮게 여겼던 미물에게 집착했다. 그러니 미물이 어찌 기쁘지 않을 수 있을까. 어찌 한심하지 않을 수 없을까. 죠노우치는 웃었다. 기뻤다. 기쁜 동시에, 절망스러웠다. 카이바 세토의 추락이, 오랜 동경이,
그의 소망이 어느 순간 추락해 떨어져버린 것이.
“넌 진짜 이상한 새끼거든.”
카이바 세토의 사랑은 이기적이었다. 독점하고 가두고는 싶지만 사랑을 인정하고 싶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늘에서 떨어져 미물에게 집착한다는 것은 그에게 얼마나 큰 수치일 것인가. 그러니 카이바는 그 자신을, 그의 오만을 지키기 위해 그가 ‘사랑한다’는 죠노우치에게 목줄을 씌웠을 것이다. 자신이 사랑하는 것이 한낱 미물이 아닌 종속된 짐승이라면 수치를 느끼지 않아도 되었을 테니까. 짐승이 주인을 사랑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 아닌가. 주인이 그런 짐승의 머리를 쓰다듬고 애정하는 것은 극히 자연스럽고도 아름다운 일이라, 하늘의 존재가 감히 미물을 사랑한다는 것보다는 형편이 더 나아 보였을 것이다. 얼마나 얄팍한 눈속임일까. 얼마나 역겨운 생각인가. 죠노우치는 카이바 세토가 혐오스러웠다. 그의 오만이, 환상을 씌운 사랑으로 정당화하려는 폭력이.
끝내는 짐승이 되어버린 카이바 세토, 그 자체까지도.
“그러니 네가 알아서 해.”
“……….”
“나는, 모르는 일이야.”
동경은 깨어져 사라졌다. 이제 카이바 세토는 죠노우치 카츠야의 그 무엇도 되지 않는다. 목줄은 걸렸으나 죠노우치는 그 무엇보다도 자유로웠다. 그의 망막에 새겨져 있던 카이바 세토의 뒷모습은 이제 없다. 날개 꺾여 땅을 기는 짐승만이 있을 뿐이었다. 죠노우치는 카이바를 비웃었다. 오랜 열등감과 동경은 이제는 없었다. 멍청한 짐승을 한심하게 생각하는 인간만이 그 곳에 있을 뿐이었다. 죠노우치는 편안하게 눈을 감았다. 남은 것은 이제 알 바 없었다. 그는 다시 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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